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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왕실서고에서 탈출한 고구리사초략 (1부)
호태왕 비문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열쇄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10/02 [11:56]

현존하는 우리나라 역사기록 중 가장 시기적으로 앞서는 기록이 바로 1,600년 전 고구리인에 의해 세워진 광개토호태왕 비문이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보다 730여년 앞서는데다가 고구리인이 직접 적었으며, 돌에 새겨져 있어 변조의 가능성이 적으므로 우리 민족의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해왔었다.

 

그 이유는 1876~1880년경 발견된 비문의 탁본이 일본육군참모부 소속 첩보장교인 사가와 가게노부(酒匂景信)에 의해 본국으로 넘겨져 1889년에 일본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여러 탁본이 나돈데다가 비에 새겨진 글자 총 1,802자 중 260여자를 읽을 수도 없고 또 그나마 판독이 가능한 글자도 희미하다보니 학자들마다 그 판독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 원석 탁본(좌)와 일제가 만든 쌍구가묵본(우)     © 편집부


그동안 호태왕 비문연구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주인공에 대한 호칭과 비의 성격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비문에 새겨진 정식칭호는 광개토경 평안호태왕(廣開土境平安好太王, 영토를 넓게 개척한 평안호태왕)’임에도 우리는 광개토왕, 광개토대왕 또는 광개토태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문에 있는 연호를 따서 영락대제라고 하든가 아니면 비문처럼 평안호태왕 또는 줄여서 그냥 호태왕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일본의 비문 조작이나 왜곡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

비문을 가장 먼저 입수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학자들을 동원해 연구를 거듭한 끝에 조선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허구의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해냈고, 또 호태왕비를 그 이론적 근거로 활용하기 위해 비문의 내용을 삭제 또는 변조하게 했는데 그에 대한 연구가 아직도 정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

 

▲ 비가 오자 호태왕비문에서 변조된 글자에서 횟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 편집부

 

현재 강단사학계에서 호태왕비문의 원문을 찾는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현재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일제식민사학을 추종하고 있어 올바른 우리역사를 찾을 생각이 없기에 호태왕비문의 원문을 찾는 연구나 노력을 아예 하지 않고 있다. 오로지 일본 사학계의 허황된 주장과 이론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의 고구리식 서글 어법으로 해석한 연구가 거의 없다.

비문에는 중간 중간 글자의 뜻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고구려 서글 어법(이두식 표현)이 들어가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지금껏 전혀 하지 못했다.

 

호태왕비문이 역사기록으로서의 가치를 더 높이려면 먼저 변조되어 사라진 비문의 원문을 찾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바른 해석을 해내야 한다. 그러한 필요성이 있기에 20145월에 각 분야별로 전문지식을 가진 뜻있는 재야학자들이 모여 호태왕비문연구회를 결성해 매주 월요일 2시간가량 연구를 시작한 지 어느덧 2년 반이 지나 금년 중으로 최종해석이 완성될 상태에까지 와있다.

 

연구방법은 지금까지 발표된 16명 학자들의 호태왕비문에 대한 서적과 자료에 있는 해석문을 서로 비교해 원문을 찾는데만 거의 1년 반 이상이 걸렸으며, 이후 매주 연구회의를 거쳐 1차 해석을 마쳤고 현재 최종 해석을 진행 중에 있다. 그 과정에서 호태왕비문의 정확한 해석에 가장 도움을 준 사료가 바로 남당 박창화 선생이 일본 궁내청 서고에서 필사해온 고구리사초략이다.

 

사학계에서 정사서로 인정하는 삼국사기에는 호태왕비문과 일치하는 내용이 거의 없는데 반해, 고구리사초략에는 비문의 거의 모든 내용이 상세하게 또는 간략하게라도 기술되어 있어 깨지고 없어지고 삭제된 글자를 상당부분 원형대로 복원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만약 고구리사초략이 없었더라면, 다시 한 번 호태왕비문 해석은 오리무중으로 빠질 뻔 했을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고구리사초략이 집필된 시기는 고구리 시조 추모대제의 붕어에 대한 찬자의 평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어 고려 말로 추정된다. 동명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나이 40 이전에 동쪽 땅을 석권해 700년이나 이어가는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다. 가히 성인이라 할 만하다. 후세에 나타난 아골타나 홀필렬(원 세조)도 역시 부끄럽게도 미치지 못할 곳에 있었다.다만,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아있었다. 초기에 후비 관련제도를 완비하지 못해 이것이 후에 폐단(일찍 죽음)이 되었고, 나라를 창업하는 것이 급했기에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애석했다.” 

 

▲ 남당 박창화 선생(좌)이 필사한 고구리사초략     © 편집부

 

남당 박창화의 <고구리사초략>

 

남당 박창화(朴昌和, 1889~1962) 선생은 충북 청원군 강외면에서 출생해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으며, 그 후 충북 영동소학교와 배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나라가 어려워지자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는데, 취조 과정에서 그가 한학에 아주 능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일경은 이러한 그를 정부에 추천해 일본 궁내청 서능부(書陵部:왕실도서관) 서고에서 조선전고(朝鮮典故)를 조사하는 사무를 맡아보도록 했는데,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12년간 촉탁직으로 근무하면서 그곳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창화 선생은 일본왕실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사료의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수탈해간 단군 관련 우리 고대사서였다고 하면서, 조선에서 수탈해간 사서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고 할 만큼 엄청난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남당은 그 사서들을 직접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가 고구리사초략, <화랑세기>, <개소문전> 등 많은 사료를 필사해 집에서 보관해오다 귀국 후 조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던 것이다.

 

▲ 왕실도서관이 있는 일본 궁내청 건물     © 편집부

 

박창화 선생은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쳐 요양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원폭이 터져 일왕이 항복하는 바람에 일본으로 가지 않고 고향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만약 일본이 5년만 늦게 항복했더라면 아마도 남당에 의해 더 많은 우리 사서들이 <고구리사초략>처럼 어두컴컴한 일본 궁내청서고에서 빠져나와 밝은 햇빛을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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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0/02 [11:56]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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