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구리보전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윤내현의 요수, 패(沛)수, 패(浿)수 란하설의 진위 (8부)
대릉하 패수설의 진위
 
김종서 역사모 회장 기사입력  2018/10/09 [19:49]

3. 대릉하 패수설의 진위  

 

()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인 패수(浿水)가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그 중에 대릉하를 패수(浿水)로 본 주장들이 있다. 그러나 대릉하(大凌河)는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고,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의패수(沛水)’새외(국경) 밖에서 흘러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그러므로 대릉하는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보는 ()나라와 조선(朝鮮)의 국경을 만번한(滿番汗)으로 정하였는데, 이 경계가 지금의 대릉하 부근이고,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의패수(沛水)가 대릉하이고,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浿水)가 해성(海城) 서남에 있는 어니하(淤泥河)’라고 하였다.

 

정인보는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흐르는 대릉하가 서남쪽으로 흘어 바다로 들어가는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라는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패수(浿水)와 패수(沛水)가 같은 음()이었기 때문에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의 패수(沛水)’가 본래는 수경(水經)의 패수(浿水),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東入于海).’는 기록의 패수(浿水)’가 바로 번한현 역내를 흐르는 물인 패수(沛水)였다고 하면서,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浿水)의 주석인 수서지증지입해(水西至增地入海)’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西入海).’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의 주석인 서남입해(西南入海)’오혼(誤混) 한 것(오해하여 잘못 바꾸어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패수(浿水)’(浿)’자와 패수(沛水)’()’자가 음이 서로 같아서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浿水)의 강 흐름과 요동군의 번한현의 패수(沛水)의 강 흐름이 서로 바뀌어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 ‘1. 요동군 패수(沛水)가 낙랑군 패수(浿水)라는 주장의 진위(眞僞)’에서 보았듯이 반고가 (浿)’자와 ()’자를 혼동하여 사용하였을 리 없고, 요동군의 패수(沛水)와 낙랑군의 패수(浿水)가 실존할 때의 역사학자들인 반고의 아버지 반표(班彪), 반고, 반고의 누이동생인 반소(班昭)의 합작품인 한서의 기록이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 강 흐르는 방향과 낙랑군 패수현을 흐르는 패수(浿水)의 강 흐르는 방향을 바꾸어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또 정인보는 한()나라가 후퇴하여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패수가 산해관 동쪽의 고려하(高麗河)가 되었다고 하였다.그러나 고려하는 현재의 북경 창평구인 순천부(順天府) 창평주(昌平州)의 동쪽 50리에 있던 강이다.산해관 동쪽의 고려하가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이었던 패수라는 주장은 만리장성의 동단(東端)이 산해관이라는 전제하의 주장일 뿐, 왜 만리장성의 동단이 산해관이고, 산해관 동쪽에 있는 강이 패수인지에 대한 논증을 하지 않았다.

 

리지린은 수경주의 백랑수가 흐르는 방향이 수경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이러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은 영정하 밖에 없고, 열하지백랑수(白狼水)가 지금의 대릉하라고 하였으며,백랑수(白狼水)는 패수(浿水)를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경주에는 패수(浿水)’조를 별도로 두고 있고, 백랑수는 대요수(大遼水)’조에서 소개하고 있다. 만약 패수와 백랑수가 같은 강이라면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강으로 소개하였을 리 없다. 또한 청()나라 건륭(乾隆) 46(서기 1781)에 편찬된 열하지에서 패수(浿水)’백랑수(白狼水)’라고 하였다 하여 조선의 멸망과 함께 없어진 한()조선(朝鮮)의 국경선인 패수(浿水)가 백랑수(白狼水)였다는 증거가 되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백랑수(白狼水)()’자와 패수(浿水)’(浿)’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백랑수(白狼水)가 패수(浿水)를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도 옳지 않다.

 

4. 윤내현의 요수, 패수(沛水), 패수(浿水) 란하설의 진위(眞僞)

 

윤내현은, “한서에 실린 요동군 번한현의 浿水(沛水)는 시간적으로 고조선 시대의 패수임이 분명하고,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浿水)는 고조선 시대의 패수(浿水)일 가능성이 크며, 설문해자에 실린 낙랑군 누방현의 패수(浿水)도 고조선의 패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윤내현은 이어서,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란하로서 갈석산으로 이어져 형성되었는데, 진제국(秦帝國) 및 서한(西漢)의 요동군이었고, 그 동부는 고조선의 서부변경이었다. 고조선의 서부 변경에는 후에 위만조선이 섰다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한사군의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이제 앞에서 소개된 여러 패수 가운데 어느 강이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浿水로서 가능성이 있는지 분명해졌다. 그 강이 浿水로 나타난 시기와 그 지리적 위치로 보아 가장 가능성이 큰 강은 한서』「지리지에 보이는 요동군(遼東郡) 번한현(番汗縣) 浿水(沛水)이며, 그 다음은 같은 한서』「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 누방현의 패수와 설문해자에서 보이는 낙랑군 누방현의 패수(浿水)이다. 이 강들은 모두 지금의 란하 유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윤내현의 주장은 다음에서 보듯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고, 심각한 논리적 오류에 빠져 있다.

첫째, 윤내현은 한서』「지리지에 보이는 요동군 번한현을 흐르는 강인 패수(沛水)’늪 패()’자를 사기』「조선열전한서』「조선전에 기록된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인 패수(浿水)강 이름 패(浿)’자로 임의대로 고친 후,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를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인 패수(浿水)’라고 하였다. 이렇게 임의대로 늪 패()’자를 강 이름 패(浿)’자로 고치는 행위는 글자 조작, 혹은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둘째 윤내현은 한서』「지리지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가 고조선 시대의 패수임이 분명하다고 단정하면서 이 패수(沛水)’를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던 패수(浿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조선(중조선 후기, 후조선) 시대에 요동군 번한현에 패수(沛水)’가 있었고, 패수(沛水)’가 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다면, 사마천이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을 늪 패()’자를 사용하는 패수(沛水)’라고 기록하지 않고, ‘강 이름 패(浿)’자를 사용하는 패수(浿水)’라고 기록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마천은 사기늪 패()’자를 모두 317회 사용하고 그 중에 227회는 패공(沛公)’()’로 사용한 반면 강 이름 패(浿)’자는 조선열전패수(浿水)’라는 강 이름으로 7회 사용하고 초세가1회 사용하는 등 ()’자와 (浿)’자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윤내현은 설문해자의 패수가 란하유역에 있었다고 하였다.그런데 란하는 뒤 고대 요수인 영정하와 현도군 염란수인 란하 위치도에서 보듯이 북쪽에서 남쪽, 혹은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반면 허신의 설문해자에는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따라서 란하는 설문해자의 패수가 될 수 없다. 혹자는 류하(柳河)처럼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란하의 작은 지류를 가지고 설문해자의 패수라고 할지도 모른다. 류하(柳河)와 같은 란하의 지류는 곧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강이 아니라 란하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이므로 동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할 수 없다. ‘동쪽으로 흘러서 ○○강으로 흘러들어간다.’라고 하여야 하는 강이다.

 

넷째, 윤내현의 요동군 패수와 낙랑군 패수(浿水)가 모두 지금의 란하 유역에 있었다는 주장 또한 성립할 수 없다. 후한서』「군국지에는 요동군은 낙랑군 동북쪽 3,600리에 있고, 현도군은 낙양 동북쪽 4,000리에 있고, 낙랑군은 낙양 동북쪽 5,000리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요동군의 동쪽 군계와 현도군의 서쪽 군계 사이는 400리 이고, 요동군 동쪽 군계에서 1,000리 동쪽에 낙랑군 서쪽 군계가 있다.

 

따라서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가 요동군 영역 중에 가장 동쪽에 있었고, 낙랑군 패수가 낙랑군 영역의 가장 서쪽에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와 낙랑군의 패수는 동서로 1,000리가 떨어져 있어야 한다. 실제로는 1,000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란하가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도 되고 낙랑군의 패수(浿水)도 된다는 주장은 후한서』「군국지의 기록에 반하는 주장으로 옳지 않다.

 

▲ 윤내현 박사의 위만조선과 한사군 위치도     © 편집부

 

다섯째, 윤내현은 한서』「지리지浿水(沛水), 한서』「지리지의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 설문해자의 낙랑군 누방현의 패수가 모두 지금의 란하유역에 있었다고 하였다.그러나 란하(灤河)는 현도군과 요동군을 흐르는 2100리 길이의 염란수(鹽亂水)였다.

 

여섯째, 윤내현은 한서』「지리지浿水(沛水), 한서』「지리지의 낙랑군 패수현의 패수, 설문해자의 낙랑군 누방현의 패수가 모두 지금의 란하유역에 있었다고 하면서윤내현의 위만조선과 한사군 위치도에서 보듯이 낙랑군 영역을 란하와 만리장성이 만나는 란양(灤陽) 북쪽의 이북으로 표시하고, 요동군 영역을 란양을 포함한 그 남쪽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윤내현의 주장이 맞는다면 한서』「지리지낙랑군 패수현의 패수와 설문해자의 낙랑군 누방현의 패수는 바다로 들어간다(入海)’가 아니라 입요동(入遼東)’ 혹은 입대요수(入大遼水)’라고 했어야 한다. 란하 하류는 대요수 이기 때문이다.

 

▲ 고대 요수인 영정하와 현도군 염란수인 란하 위치도     © 편집부

 

일곱째, ‘윤내현의 위만조선과 한사군 위치도에서 보듯이 낙랑군 영역을 란하 중류 유역으로부터 대릉하 유역까지로 표시하고, 현도군 영역을 대릉하 북동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러한 윤내현의 위치 표시는 후한서』「군국지낙양 동북쪽 4,000리에 현도군이 있고, 낙양 동북쪽 5,000리에 낙랑군이 있다는 기록의 정반대이다. 낙랑군 서쪽 1,000리 지점에 있을 현도군의 서쪽 경계를 반대로 낙랑국의 서쪽 경계에서 동쪽으로 1,000리도 더 간곳에 배치하고 있다. 낙랑군현도군이 실존할 당시에 조사된 후한서』「군국지의 기록에 반하는 주장으로 옳지 않다.

 

여덟째, 윤내현은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이었던 요수(遼水)’가 오늘날의 란하(灤河)’라고 단정한 후에,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인 패수(浿水)도 란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윤내현의 요수(遼水)가 란하(灤河)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오역(誤譯), 오인(誤認)하였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다.

 

윤내현은 요수(遼水)가 란하(灤河)’라는 근거의 하나로 회남자』「지형훈편의 요수(遼水)에 대한 고유의 주석인 요수출갈석산(遼水出碣石山) 자새북동류(自塞北東流) 직요동지서남입해(直遼東之西南入海)’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와 요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곧게 요동의 서남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해석 한 후, 이 요수가 흐르는 방향이 지금의 란하와 일치한다고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윤내현의 주장은 위 요수(遼水)가 흐르는 방향에 대한 기록의 해석을 란하의 흐르는 방향과 일치시키기 위해 변방<()>으로부터<()>북동쪽으로<북동(北東)>흘러서<()>요새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로 오역(誤譯)한 것으로 옳지 않다.

 

    필자는 회남자』「지형훈편의 요수출갈석산(遼水出碣石山) 자새북동류(自塞北東流) 직요동지서남입해(直遼東之西南入海)’요수가 갈석산에서 나와서 변방으로부터 동북쪽으로 흘러서 곧게 흘러 요동의 서남쪽 바다로 들어간다.’라고 해석한 후 이러한 강 흐름을 보이는 강은 북경천진의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永定河, 정하 상류는 회하(恢河) 상간하(桑干河)}와 대릉하(大凌河)밖에 없다는 점을 밝히고, 대릉하는 중국의 6대강이 되기에는 너무 적기 때문에 영정하 만이 고대의 요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바 있다.

 

윤내현은 요수(遼水)가 란하(灤河)’라는 또 다른 근거로 설원』「변물편의 요수(遼水)에 관한 기록을 들고 있다. 윤내현은 제나라 환공이 관중과 더불어 산융과 고죽국을 친 기록이 있는데, 그때 그들은 고죽국에 이르러 요수를 건넌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에 산융은 하북성 북쪽에 있었고, 고죽국은 란하 유역에 있었다는 것은 이론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융을 치고 고죽국에 이르러 건넜던 강은 행군 방향으로 보아 란하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윤내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설원은 전한 말 학자인 류향(劉向, 서기전 77~서기전 6)이 춘추시대부터 전한초기까지 활동한 선현들의 일화를 기록한 설화집이다. 설원, “나라 환공(서기전 685~ 서기전 642)이 북쪽의 고죽국을 정벌하기 위해 비이산 계곡 10리에도 채 이르지 못하였을 때 갑자기 행군을 멈추고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어서 잠깐의 시간을 가지고 화살을 들었으나 감히 쏘지를 못했다. 그리고 한숨을 쉰 연후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 일(고죽국을 치는 일)을 이룩하지 못할 것인가. 내가 지금 본 것은 키가 큰 사람이었는데, 면류관을 쓰고 대체로 사람의 형상을 갖추고 좌측 옷자락을 든 채, 군중의 앞을 말 타고 지나갔소이다.’라고 하였다.

 

관중이 말하여 이르기를, ‘(고죽국을 치는 일은)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인형은 도를 아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의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간 것은 길을 인도하는 것이고, 좌측 옷자락을 들고 있는 것은 앞에 강이 있으니 좌측 방향을 쫓아서 건너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0리를 더 나아가자 과연 강이 있었다. 그 강 이름을 일러서 말하기를 요수(遼水)’라고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의 위 해석에서 보듯이 제나라 환공과 관중이 고죽국을 정벌하기 위하여 건넌 강이 요수(遼水)이다. 윤내현의 환공과 관중이 이미 고죽국에 이르러 요수를 건넌 것이라는 해석은 옳지 않다.중국 학계에서는 고대유물, 역사 기록 등을 근거로 란하 서남쪽에 있는 하북성 당산시(唐山市) 난남현(灤南縣) 대마장촌(大馬莊村)을 고죽국의 중심지역으로 본다.

 

따라서 요수는 난남현 대마장촌(大馬莊村) 서쪽에 있던 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산융동호는 산서성 중북부 및 하북성 북서부 지역과 그 북쪽 지역에 있었고, 요수는 대릉하 이었다.

 

여덟째, 윤내현은 사기』「하본기의 갈석(碣石)에 대한 주석인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기록과 진서』「당빈전당빈唐彬…… 마침내 옛날 국경을 개척하였다. (장성 남쪽의 구토를 회복하여 그 땅에 살던 북방종족들을 다시)물리친 땅이 1,000리나 되었다. 진나라 때의 장성과 요새를 다시 복원하니 온성으로부터 갈석산에 이르도록 산과 계곡에 길게 연이어서 뻗친 장성의 길이 또한 3,000리나 되었다. (이 장성과 요새에)군사들을 나누어 주둔시켜서 (북방종족의 침입으로부터)지키도록 하였는데, 봉화대와 봉화대가 서로 마주 바라다 보이도록 하였다.” 라는 기록명일통지조선성(朝鮮城)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라는 기록, 로사()의 낙랑이 지금 평의 노룡에 조선성이 있다.”라는 기록 등을 근거로 장성 밖을 낙랑군 영역으로 그리고, 란하를 낙랑군 패수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태강지리지의 기록은 대릉하 유역의 낙랑군이 고구려에 쫓겨 서쪽으로 후퇴한 이후의 기록이고, 영평부에 조선성이 있다는 조선성은 낙랑군 소멸 후 낙랑군 잔존 세력이 후퇴하여 살던 조선인 거주지이다. 따라서 이 기록들을 근거로 란하 패수설, 란하 낙랑군 설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처럼 윤내현의 요수 란하설’, ‘란하 패수설’ ‘낙랑군 재란하유역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고, 요동군 번한현의 패수(沛水)가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인 패수(浿水)라는 전제도 잘못되었으며, 논리 전개도 잘못되었다. 따라서 란하가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선 이었던 패수(浿水)였다고 하더라도 윤내현의 주장으로는 란하가 패수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할 수 없다. 또한 요하 유역이 낙랑군 영역이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윤내현의 요수 란하설, 패수 란하설, 란하 유역 낙랑군설 등에 의거한 이덕일의 주장도 옳지 않다.

 

윤내현은 패수에 대한 종래의 견해 가운데 란하를 패수로 본 장도빈(張道斌)과 문정창(文定昌)의 견해가 가장 정확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간 이 견해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장씨나 문씨가 그들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였고, 그 고증방법이나 논리의 전개도 구체적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술논문으로서의 체제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고 하였다.따라서 장도빈과 문정창의 란하 패수설은 학설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별도로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8/10/09 [19:49]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