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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력을 잃고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 (1부)
기라성 같은 당태종 이세민의 신하들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10/16 [14:55]

혁명원로들의 자제들을 일컫는 일명 태자당(太子黨)의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손자, 주더(朱德) 전 국가부주석의 손자, 리셴녠(李先念) 전 국가주석의 사위,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의 사위 등이 오는 10월에 열릴 제19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대거 탈락되었다. 이들은 같은 태자당인 시 주석의 정치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인물들이기에 권력중심부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일인체제를 확고하게 굳히려는 시진핑 주석은 태자당 뿐만 아니라 장쩌민 전 주석의 상하이방과 후진타오 전 주석과 리커창 총리의 공산주의청년단까지 부패척결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권력의 핵심에서 하나둘씩 철저히 배제시키고 있다. 중국 인민들이 시진핑의 일인체제를 원해서 일까? 아니면 시 주석 자신의 정치욕망 때문일까?

 

사실상 시진핑의 치세 5년간 중국은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고 계속 양극화의 길을 걸어왔다. 중국의 지난해 지니계수는 0.465를 나타내 작년의 0.462보다 더 올라갔다. 양극화의 척도이며 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상승한 것은 5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참고로 지니계수가 0에 가까우면 소득분배가 균등하게, 1에 가까우면 불균등하게 이뤄졌다는 뜻이며, 보통 0.4가 넘으면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가 매우 심각한 것으로 본다.

 

 

시진핑은 집권하면서 완전한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하면서, 최대국정과제의 하나로 '빈곤퇴치 및 중산층 사회건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작년 지니계수는 그가 내세운 달콤한 구호와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 결과로, 시 주석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이다. 그가 중국몽(中國夢)과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추진하며 내세운 대당성세(大唐盛世)가 그야말로 허장성세(虛張聲勢)였듯이 말이다.

 

▲ 2020년까지 샤오강사회를 완공한다는 중국정부의 거짓말광고   ©

 

자제력을 잃고 아집에 빠진 당태종

 

역사를 움직일만한 인물의 휘하에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많은 법이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이숙번, 하륜, 조영무, 숙부 이화, 사촌 이천우, 처남 민무구·민무질 등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집권하고 이세민은 장손무기 등과 함께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결국은 왕이 되는데, 그 집권과정은 서로 비슷하나 당 태종 이세민의 신하영입과정은 이방원과는 완연히 구분된다.

 

<정관정요>에 등장하는 45명의 이세민의 신하 중 가장 극적으로 영입된 케이스가 바로 위징(魏徵)이다. 만약 이방원이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길 바랬던 정몽주를 죽이지 않고, 이세민이 위징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처럼 처신했다면 그 다음은 어떤 일들이 진행되었을까? 여하튼 이 점이 두 인물의 그릇 차이로, 이세민은 영웅의 자질을 처음부터 타고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 당태종의 무덤 앞에 있는 이세민의 입상     © 편집부

 

방현령은 수나라의 엘리트 관료 출신으로 양제 말기의 혼란기에 이연/이세민과는 반대 입장에 섰던 인물이었으나 등용되어 제정을 맡아보게 되었는데 당 태종의 신망이 무척 두터웠다고 한다. 626년 두여회, 장손무기 등과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이세민이 권력을 잡도록 했다.

 

나중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장수 이적은 본명이 서세적(徐世勣)이었다. 위징과 함께 이밀의 휘하에서 크게 활약하다가 이밀을 따라 당으로 귀순해 고조 이연에게 왕성인 이()씨를 하사받았고, 이세민이 왕위에 오르자 자를 피휘해 이적이라 불렸다. 629년에 돌궐을, 641년에 설연타를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장수였다.

 

이세민 휘하 최고명장이었던 이정(李靖)은 처음엔 양제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이연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길이 막혀 장안에 머물던 중 성이 함락되면서 이연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연은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이세민이 이를 만류해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였다. 또한 이정에 버금가는 용장 위지경덕(尉遲敬德) 역시 농민반란군을 이끌다 이세민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휘하가 되었다.

 

위와 같이 휘하의 인재들을 보는 눈이 뛰어났던 이세민은 성품이 관대하고 타고난 그릇이 큰 인물인데다가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까지 가미되어 강한 카리스마를 보임으로서 휘하의 인재들에게 끝없는 충성심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정관 17(643) 위징이 죽자 균형감 있던 이세민의 제어 장치도 사라져 버렸다.

 

이세민은 수나라 양제로부터 계속된 혼란을 종결시키고 안정과 번영을 가져옴으로써 당나라는 10년 이상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시간이 갈수록 이세민은 점차 초심을 잃어갔다. 자제력을 상실해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신하들의 직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의 강했던 카리스마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흔들리지 않는 아집으로 변해갔다. 위징이 죽자마자 당 태종 이세민의 입에서 드디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치통감>에 정관 17(643) 94일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인들이 당으로 조견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니 군사를 내어 구원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는 당나라에게 인질을 보냈으며, 조공을 줄이지 않았으니 고구려는 군사를 당장 거두어라. 너희가 백제와 더불어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명년에 군사를 움직여 너희 고구려를 칠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연개소문에게 신라 공격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가 묵살당하고 귀국한 사신의 보고를 받은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면서 대신들을 해치고 그 백성들에게 잔악한데다가, 또 나의 명령을 어기면서 신라를 침략했으니 토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세적이 전에 설연타가 침략했을 때 끝까지 토벌했어야 했는데, 위징의 간언대로 중지하는 바람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을 거들었다.

 

이에 당 태종은 그렇소. 그건 위징의 실수요. 짐은 곧 후회했으나 말하지 않은 것은 누군가가 훌륭한 모의를 막을까 걱정했기 때문이오.”라고 자신하면서 요동정벌의 친정을 공표했다. 드디어 당태종은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644720일에 염입덕 등에게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에 가서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실어놓으라는 칙령을 내렸다.

 

925일 연개소문이 백금을 공물로 보내니 저수량은 막리지는 임금을 시해하고, 구이(九夷)도 용납하지 않아 지금 그를 토벌하려고 하는데 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니 당 태종은 이에 따르면서 고구려 사자들에게 너희들은 모두 고무(영류왕)를 섬겼고, 관직에 있었다. 막리지가 시역을 했음에도 너희들은 복수는 커녕 그를 위해 일하면서 큰 나라를 속이려 하니 어느 죄가 큰 것이야!”라고 말했다.

 

드디어 당나라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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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0/16 [14:55]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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