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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2인자에서 태양이 되고싶었던 당태종 (2부)
수양제의 패전원인을 작전으로 택한 당태종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11/21 [05:40]

당 태종 이세민은 요새 군대용어로 전군에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하고, 북쪽 영주(營州)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비축하라고 지시했다. 수양제의 작전을 그대로 반복해서는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당 태종은 수양제의 패인을 분석해 완전 정반대의 전략으로 요동정벌에 임하겠다고 결심했다.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양제의 참패원인이 요동정벌의 전략

 

(1) 수양제가 참패한 첫째 원인은, 병사를 정예병 위주로 동원하지 않고 군세를 과시하기 위해 오합지졸까지 포함해 머리수만 많은 대군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후방 군수물자 수송인원까지 합쳐 총 300만 명이 넘는 대군에서 실제로 전투를 수행할만한 병력은 채 수십만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오합지졸이 훨씬 많아 행군의 속도만 늦어졌고 군량도 축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당 태종이었기에 정예군으로 10만 명을 강제징집이 아닌 모집으로 했다.

 

(2) 수양제의 둘째 패인은 백만이 넘는 전투병력을 투입해 수차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선봉대 30만 대군에게 곧바로 평양성으로의 진군을 명했기 때문이다. 도중에 있는 고구려 산성들을 차례차례 점령하지 않고 너무 깊이 들어갔기에 수나라 군대는 보급로가 끊기게 되어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 전투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래서 당 태종은 평양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산성들을 하나씩 함락시키고 진군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3)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수양제가 패한 세 번째 원인을 군량수송을 담당한수군의 패배로 보았다. 수백만 육군은 군량을 스스로 지고 가서 행군할 때 식량으로 사용하고, 따로 수군으로 하여금 전국에 있는 양식을 목적지로 운반해 주둔하는 군사들의 양식으로 사용하려는 전략이었는데, 수송선박이 고구려 수군의 공격으로 침몰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수양제가 패한 진짜 세 번째 원인은 쓸데없이 병력이 너무 많다보니 식량보급선이 한없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탁군(涿郡)에 모인 수나라 대군이 매일 1군씩 군사를 보내면서 서로간의 거리가 각각 40리 정도 되게 했고,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어 960 리에 뻗치는 장관인 행군 출발이 40일 만에 끝났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요하를 건너 고구려 관문인 요동성을 공격할 때만 해도 식량문제가 없었다.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수양제가 30만 선봉대에게 평양성으로의 직접 진격을 명하면서 각자 100일치의 식량과 전투장비, 장막, 공성도구 등을 지급하는 바람에 1인당 3섬이 넘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병사들이 식량을 장막 밑에 모두 파묻는 바람에 야기된 식량문제였다.

 

실제로 수나라 장수 우문술이 이끄는 선봉대 30만 대군은 보급선이 끊긴데다가 을지문덕 장군이 작전상 후퇴하면서 들판의 먹고 마실 것을 없애는 청야(淸野)전술로 인해 평양으로 가는 행군 중간에 식량이 바닥나 제대로 힘 한 번 못쓰고 돌아오다가 살수에서 역공을 받아 대군이 거의 전멸되었다. 

 

▲ 상대의 보급선 차단은 고구려가 주요 수비전략     © 편집부


그래서 당 태종은 식량을 후방에서 지원하면서 자급자족을 덧붙이는 전략을 택했다. 각 단위부대에 병사들이 타고 갈 수 있는 말, 짐을 운반할 수 있는 소, 젖을 얻을 수 있는 양 몇 마리씩을 분배했는데, 그 이유는 병사들이 식량을 각자 짊어지지 않고 소로 운반하게 하고, 식량이 부족해지면 병사들이 소··양 등을 도축해 고기를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4) 수양제의 넷째 패인은,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고구려와 싸웠기 때문이라고 여겨, 당 태종은 신라 김춘추가 구원을 청해오자 공수동맹의 의를 맺고는 고구려의 후방을 교란시키게 하려고 했다.

 

당 태종은 위와 같은 전략을 주도면밀하게 수립한 뒤, 6447월에 군대를 낙양에 집결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10월에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에 임명했고 이적을 요동도(遼東道)행군대총관에 임명하고 강하왕 이도종을 부대총관에 임명했다. 앞에 가는 이적과 장량의 부대가 요동에서 만나 합치도록 했고, 당 태종은 친위군을 직접 거느리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하늘의 태양이 되고자했던 당태종

 

그리고 자신이 친정하는 요동정벌을 떠나기 전에 도성에 사는 노인들을 초청해 위로하며 “(지금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 땅은 옛날에 중국의 영토였고, 막리지(연개소문)가 영양왕을 시해했으니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짐이 그대들에게 약속하건대, 나를 따라 종군하는 자손들은 내가 잘 위로하고 어루만질 것이니 아무 근심걱정을 말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옷감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고 한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당 태종에게 친정하지 말 것을 권했다. 그럼에도 이세민은 나도 그대들이 무슨 말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향하고,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가는 이 세 가지는 모두 상서롭지 않다.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개소문이 왕을 시해했고, 또한 대신들을 도륙내고는 정사를 제멋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짐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가지 않기를 권하는 대신들은 이 점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객기를 부렸다.

 

▲ 한중 고대사 최대의 라이벌인 연개소문과 이세민     © 편집부

 

 

위징이 죽기 전에 그토록 말렸던 요동정벌을 당 태종이 친정하기로 결심한 표면적인 이유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당나라에게 우호적이던 영양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고, 그럼에도 사신을 보내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연개소문에게 신라를 더 이상 침략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이를 어겼다는 이유라고 많은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다. 과연 그 이유가 이것뿐이었을까?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이는 그가 내건 표면적인 이유이고, 당 태종이 친정으로 요동정벌을 결심한 진짜 이유는 자신이 연개소문을 누르고 이 세상에 하나뿐인 태양이 되고 싶어서였다. 당 태종은 그릇이 큰 인물이다. 그 그릇이 큰 만큼 야망 또한 컸었다. 집권 초기에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주변의 돌궐들을 달래느라 언감생심 요동정벌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주변 돌궐들이 자체분열로 세력이 약화되고, 당나라 내부의 정치도 안정되고 산물이 풍부해지는 등 안정궤도가 장기간 지속되자 자신이 이 세상에서 2인자라는 사실이 심히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2인자 지위에서 도약해 명실공이 천하제일인자가 되고 싶었기에, 연개소문에게 도전장을 던졌던 것이다. 마침 이를 제어할 위징 같은 신하가 당나라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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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21 [05:4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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