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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에게 항복하고 식민지가 된 왜 (3부)
80~90%가 죽자 나라를 들어 항복한 왜를 군국으로 만든 호태왕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11/29 [22:03]

세칭 신묘년 기사로 알려진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到海 破百殘曷侵新羅以爲臣民의 해석은 백잔과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고, 왜는 신묘년(391, 호태왕 즉위년)부터 와서 (조공을 바쳤다). (고구리가) 바다를 건너가 백잔을 격파했고, 말갈이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략했다.” 즉 왜가 가야·신라에 식민지인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말갈이 신라를 신민으로 삼기 위해 침략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놓은 문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왜의 움직임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리사초략>에는 5, 왜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미녀 5명을 바치면서 선록(선도관련 책자)을 달라고 하였다.(五月 倭使来献圡物及美女五人 以求仙籙.”라는 기록이 있어 5년 을미년 기사의 세칭 신묘년 문구는 임나일본부설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일본학계의 해석대로라면 종주국인 왜가 당연히 위험에 빠진 식민지 백잔을 구원하러 출동했어야 하지 않은가?

 

호태왕이 백제를 공격한 이유

 

이듬해인 병신년(396) 3월에 호태왕이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잔을 공격해 도성을 포위하니 아신왕이 무릎을 꿇고 영원한 노예가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항복했다. 그 전쟁에서 백잔의 58개 성과 700개 촌락을 빼앗고, 아신왕의 동생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데리고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개선했다는 문구가 이어진다.

 

호태왕이 옛날부터 속민이었다는 백잔을 친히 정벌한 이유는 백제 아신왕이 즉위 이후 계속 도발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비문에는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으나, <고구리사초략>에는 다음과 같이 백제가 거의 매년 고구리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보다보다 못한 호태왕이 백제 아신왕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직접 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 MBC 태왕사신기의 한 장면. 호태왕에게 항복하는 백제 아신왕     ©편집부

 

3(393) 계사 8, 아신이 우리(고구리)가 거란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 내부가) 비었을 것으로 여기고, 진무로 하여금 석현과 관미성을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三年癸巳八月 莘聞我征契丹 以為虗而使真武侵石峴又侵関彌 不克而去)

 

4(394) 갑오 7, 진무가 또 쳐들어왔다. 상이 기병 5천으로 수곡성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맞싸워 거의 모두를 참살하였다. 남은 무리는 골짜기에 숨었다가 야밤에 달아났다.

(四年甲午七月 真武又寇 上以五千騎迎擊於水谷城下 斬獲殆盡 餘寇慴伏於谷中而夜遁)

 

5(395) 을미 8, 진무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상이 기병 7천을 몰아 패수 위에서 8천여 급을 노획했다. (五年乙未八月真武又乘虗入寇 上以七千騎馳到浿水上虜獲八千余級)

 

왜를 초토화시키는 호태왕

 

영락 9(399)에 신라는 왜가 쳐들어오자 호태왕에게 급히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호태왕이 5천 기병을 즉각 보내려했는데, 신라 내물왕이 왜가 이미 돌아갔음을 알려와 출병을 중지시켰다. 이후 백제 아신왕은 왜왕에게 함께 고구리를 치자고 제의했지만 왜왕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고구리에게 조공을 성심껏 바쳤다. 역시 임나일본부설이 허구라는 증거기록인 것이다.

 

이듬해(400) 왜가 다시 신라를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은 호태왕은 보·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해준다. 그 내용이 아래와 같이 비문에 있는데 관련 글자들이 집중적으로 깨어져있어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누가 과연 이 글자들은 깨버렸고,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있기에 깨버린 것일까? 일단 보이는 글자로만 해석을 해보도록 하겠다.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方至倭賊退官兵由新羅躡追來背急迫任那加羅從拔城城即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城倭⭍⭍潰城⭍⭍⭍⭍⭍⭍⭍⭍⭍⭍⭍⭍⭍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安羅人戍兵

昔新羅錦未有身來朝貢⭍⭍⭍⭍廣開土境好太王⭍⭍⭍⭍⭍⭍⭍⭍⭍⭍⭍⭍僕勾⭍⭍⭍⭍朝貢

 

“10(경자)에 보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하러 가라고 교지를 내렸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까지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 차 있다가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들이 모두 퇴각했다. 관병은 신라를 따라 바짝 추격해 임나가라에 이르기까지 배후에서 급박하게 줄줄이 성을 공략했다.” 이어 깨진 글자 13개가 있고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요 남은 신하들을 데리고 오매 신라인으로 수비병을 세웠다.”

 

이후에는 59자가 연속으로 깨어져 있어 판독이 도저히 불가능하며, “신라인으로 수비병을 세웠고, 예전에는 신라 매금이 친히 와서 조공하지 않더니 ⭍⭍⭍⭍, 광개토경호태왕께서이후 또한 결자가 많아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문구는 호태왕이 신라를 침략한 왜적을 격퇴하는 내용인지라, 당시 피해의 당사자였던 일본인들이 고의적으로 글자들을 없앴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느낌도 없지 않다"고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글자가 조작되어 비가 오면 횟물이 흘러내리는 호태왕비     ©편집부

 

게다가 깨어진 에는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차마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치스러운 내용이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들의 내용은 고구려군이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쓸어버리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사라져버린 들의 내용을 밝혀낸 학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이대로 호태왕 비문의 미스테리는 영원히 미궁 속에서 못 빠져 나올 것인가!

 

<환단고기>를 출간했던 운초 계연수 선생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호태왕 비문을 직접 보고 적었다는 비문징실(碑文徵實)’이 이유립 선생의 대배달민족사에 전해지고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계연수 선생은 일본경찰에 의해 사지가 잘린 채 압록강에 던져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일제가 비문의 있던 글자를 쪼아 없애버리기 전에 원본 글자를 먼저 입수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총리 이등박문을 척살한 안중근 장군도 정식재판을 받지 않았는가? 일본은 계연수 선생을 정식재판에 회부할 경우 호태왕 비문의 내용이 만천하에 알려질 것을 염려해 몰래 죽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비문징실이 도대체 어떠한 내용이기에 그러한 일까지 일어났던 것일까? (빨강색이 깨어진 글자 )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方至倭賊退官兵由新羅躡追來背急迫至任那加羅從拔城城即歸服安羅人戍兵拔新羅城城倭寇大潰城大被我攻盪滅無遺倭遂以國降死者十之八九盡臣率來安羅人滿假改慮倭欲敢戰與喙己呑卓淳諸賊謀再擧官兵制先直取卓淳而左軍由淡路島到但馬右軍經難波至武藏王直渡竺斯諸賊悉自潰分爲郡國安羅人戍兵

昔新羅錦未有身來朝貢今始朝廣開土境好太王能以德濟化咸來臣僕勾茶川亦來朝貢

 

(해석) “10(경자)에 보기병 5만이 가서 신라를 구원하라고 파견교지를 내렸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까지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 차 있다가 관군이 도착하니 왜적들이 모두 퇴각했다. 관병은 신라를 따라 바짝 추격해 임나가라에 이르기까지 배후에서 급박하게 줄줄이 성을 공략했다. 안라인 수병들이 신라성과 염성을 공격하니 왜구가 모두 패해 달아났다. 성을 크게 정비하고 우리가 공격해 남김없이 쓸어 없애자 왜가 드디어 나라를 들어 항복해왔으며,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요 남은 신하들을 데리고 오매 신라인으로 수비병을 세웠다.

 

왜는 겉으론 안 그런 척 하면서 마음을 바꿔먹고 감히 싸우려고 훼, 기탄, 탁순의 여러 도적들과 다시 일어나려고 모의하였다. 관병이 먼저 이를 제압하고자 탁순을 아우르고 좌군은 담로도를 거쳐 단마에 이르고, 우군은 난파를 지나서 무장에 이르자 왕께서 직접 배로 축사로 건너시니 모든 도적들이 죄다 스스로 무너졌다. 이를 나누어 군국(식민지 나라)을 만들고 신라인을 수병으로 세웠다. 

 

▲ 원자폭탄을 맞고 맥아더 장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일본     ©편집부

 

▲ 아직도 정한론을 주장하는 일본 우익     ©편집부

 

 

위 비문징실의 내용은 왜군이 고구리의 보기병 5만에게 대패해 80~90%의 병력이 죽자 나라를 들어 항복했으며, 결국에는 호태왕에게 도성까지 함락당해 고구리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한론(征韓論)의 근거가 된다는 임나일본부설까지 조작해가며 조선을 지배하려던 일제가 그 반대의 내용이 들어 있는 이러한 호태왕 비문의 내용을 그대로 둘 리가 없지 않은가! 계연수 선생의 암살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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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1/29 [22:03]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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