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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참패한 안시성은 어디인가? (1부)
안시성 전투의 시대배경과 당태종의 전략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12/30 [14:50]

 

목 차

. 머리말

. ·당전쟁의 진행과정

1. 시대배경과 당태종의 전략

2. 요수와 200리 요택은 어디인가?

3. 요동성을 함락시킨 당태종

4. 춘추필법으로 기록된 주필산 전투

5. 안시성 앞에 쌓은 토산

6. 안시성에서 철수하는 당태종

7.국지전을 벌인 당태종의 죽음

 

. 안시성의 위치는 어디인가?

1. 열하일기 속 안시성

2. 조국을 멸망시킨 설인귀

3. 기록으로 찾아간 안시성

. 맺음말

 

 

. 머리말

 

안시성(安市城)’이라는 단어는 민족구성원들의 가슴을 무척이나 설레게 하며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구리의 후손이라는 자긍심도 한껏 느끼게 해준다. 그 이유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는 당태종이 고구리의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천하의 패권을 놓고 한판승부를 겨루다가 안시성주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다쳐 참패하고는 울면서 돌아간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럽고 감동스러운 승리였겠지만, 중국에게는 정강의 변과 더불어 치욕의 역사였기에 그들의 사서에는 철저하게 춘추필법으로 기록된 왜곡된 역사만이 남아있다. 정강의 변이란 1126년 금나라(여진)가 송나라를 공격해 패망시키고 휘종과 흠종을 사로잡은 사건을 말한다. 정강은 당시 북송의 마지막 연호이며, 왕족 조구가 양자강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운다.

 

▲ 금 태종에게 사로잡혀 등에 생양피를 뒤집어쓰는 치욕을 당하는 송나라 휘종과 흠종 부자     © 편집부

 

참고로 춘추필법의 사필원칙(春秋筆法史筆原則)은 다음과 같다.

존화양이(尊華攘夷) 중화를 높이고 이족은 깎아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 중국 역사는 상세히 외국 역사는 간단히,

위국휘치(爲國諱恥) 나라를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

 

그런 안시성은 2008년 요서군의 상징인 고죽국 백이·숙제의 무덤이 발견되고 낙랑군의 패수현 위치까지 밝혀져 그 위치가 명백해짐으로써 고구리는 동쪽 한반도에서부터 서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대제국을 경영했으며 주 활동무대가 산서성 남부라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이렇듯 웅대했던 고구리에게 눌려 섬서성과 황하주변 하남성에서 웅크리고 살았을 정도로 초라했던 한족은 명나라와 민국 때 자행된 지명이동과 최근의 동북공정을 통해 현재의 중국 땅에서 있었던 역사는 모두 중국사라고 억지를 부렸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영원한 식민지배를 위해 우리의 민족정신이며 혼인 역사를 말살했다. 단군신화를 조작해 칠천년 역사를 지워버리고, 대륙을 지배했던 역사를 한반도 가두리 양식장으로 몰아넣은 반도사관을 확립시켰다.

 

광복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일제식민사학과 동북공정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의 희망찬 미래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안시성 학술대회를 계기로 우리의 숨겨져 있던 장엄한 역사가 빛을 보고 잠자고 있던 위대한 민족정신이 다시 깨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금부터 그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다.

 

. ·당전쟁의 진행과정

 

1. 시대배경과 당태종의 전략

 

고구리를 침공했던 수양제가 친위대에게 죽음으로써 수나라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618년 이연(李淵)이 새롭게 나라를 열어 당()이라 했다. 초기에는 고구리와의 화친정책으로 서로 큰 충돌이 없었으나, 6266월 아들 이세민이 현무문에서 두 형을 죽이고 조카들까지 무참히 살해하자 당고조(이연)2개월 후 퇴위하고 이세민이 등극함으로서 당나라와 고구리 사이에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 ·당전쟁의 시대적 배경

당태종은 사전작업으로 628년 고구리로부터 지도를 넘겨받고, 631년 사람을 보내 수나라 병사들의 해골을 묻고 전승기념물인 경관(京觀)까지 헐어버린다. 641년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산천을 구경한다는 구실로 고구려의 지형을 세밀하게 조사하게 한다.

 

한편 642년 고구리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영류왕이 시해되고 조카인 보장왕이 옹립된다.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이 당나라와 신라에 대해 강경자세로 전환하자 드디어 당태종이 요동정벌의 칼을 뽑아든다.

 

▲ KBS 드라마 ‘칼과 꽃’에서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는 장면     © 편집부

 

명분은 본시 고구리 땅은 과거 중국의 고토였기 때문에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요동정벌의 실제 목적은 고구리가 있는 한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즉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으니 연개소문이라는 태양 하나를 떨어뜨려 자신만이 천하에 유일한 태양임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것이 진짜 속셈이었다.

 

당나라는 수양제로부터 계속된 혼란을 종결시키고 안정과 번영을 가져옴으로써 10년 이상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자 시간이 갈수록 이세민은 점차 초심을 잃고 자제력을 상실해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며 신하들의 직언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의 강했던 카리스마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흔들리지 않는 아집으로 변해갔다. 유일한 제어장치인 위징이 죽자마자 당태종의 입에서 드디어 요동정벌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643년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다시 고구리와 연합해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에게 군사를 보내 구원해 달라고 빌었다. 당태종은 고구리에게 군사를 당장 거두라고 하면서 신라를 다시 공격하면 고구리를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묵살해버렸다.

 

그러자 6447월 당태종이 염입덕에게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실어놓으라는 칙령을 내리는 등 전군에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하고, 북쪽 영주(營州)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비축하라고 지시했다. 드디어 당나라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대명일통지>순임금이 기주의 동북을 나누어 유주와 금주로 했다. 상나라의 고죽국이며 주나라의 유주 땅이다. 진나라 때는 요동군 땅이었으며 또 이 유주는 요서군이 되었다. 한나라 때는 무려와 망평현 땅이었으며 요동군에 속했다. 당나라에서는 유성현을 설치했으며 영주에 속했다.”라는 기록이 있어 영주는 유주와 같거나 접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 천하의 라이벌이었던 고구리의 연개소문과 당태종 이세민     © 편집부

 

2) 당태종의 전략은 수양제의 참패원인

수양제가 펼쳤던 작전을 그대로 반복해서는 고구리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당 태종은 수양제의 패인을 분석해 정반대의 전략으로 요동정벌에 임하겠다고 결심했다.

 

(1) 첫째, 수양제는 정예병만을 출동시키지 않고 군세를 과시하기 위해 오합지졸을 포함해 머리수만 많은 대군을 동원했다. 300만 명이 넘는 군사 중 오합지졸이 훨씬 많아 행군속도도 늦어졌고 군량만 축냈기 때문에 참패했다고 판단한 당태종은 정예군 10만을 강제징집이 아닌 모집으로 충당했다.

 

(2) 둘째, 요동성을 대군으로 수차례 공격했다가 함락되지 않자, 수양제는 선봉대 30만 대군에게 곧바로 평양성으로의 진군을 명했다. 선봉대가 평양성까지 중간에 있는 성들을 차례차례 점령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깊숙하게 들어갔기 때문에 보급로가 끊겨져 참패했다고 판단한 당태종은 평양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성들을 하나씩 함락시키고 진군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3) 셋째,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수양제의 참패원인을 군량수송을 담당한 수군이 패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수군으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려는 전략이었는데, 수송선박이 고구리 수군의 공격으로 침몰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으나, 쓸데없는 병력이 너무 많다보니 보급선이 한없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태종은 식량을 지원은 하되 자급자족도 가능한 전략을 택했다. 예하부대에 말, , 양 등을 분배해 수송수단으로 이용하다가 식량이 부족해지면 도축해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4) 넷째 수양제가 주변국들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고구리와 싸웠기 때문에 참패했다고 판단한 당태종은 마침 신라에서 김춘추가 구원을 요청해오자 동맹을 맺고는 고구리의 후방을 공격해 교란시키라는 임무를 주었다.

 

6447월 당태종은 군대를 낙양에 집결시키라 명했고, 10월에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 이적을 요동도(遼東道)행군대총관에, 강하왕 이도종을 부대총관에 임명했다. 앞에 가는 이적과 장량의 부대가 요동에서 만나 합치도록 했고, 당태종은 친위군을 직접 거느리고 뒤따라가기로 했다.

 

당태종이 요동정벌에 친정한 표면적인 이유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당나라에게 우호적이던 영양왕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음에도 사신을 보내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연개소문에게 신라를 더 이상 침략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음에도 이를 묵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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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12/30 [14:5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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