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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도읍지를 찾아서 (1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9/06/17 [20:32]

 

. 머리말

. 고구려 도읍지 관련 기록들

     1. 고구려의 시국처 졸본성

      2. 초기도읍지 국내 위나암성

     3. 관구검에게 불탄 환도성

     4. 평양성, 동황성, 장안성

      5. 당태종의 대군을 물리친 안시성

. 고구려의 도읍지는 어디인가?

     1. 신당서』「열전 145 동이

. 맺음말   

 

국 문 요 약

 우리 민족의 고대강역을 분명하게 하는 키워드인 고구려의 도읍지를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무척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현재 한국의 역사이론이 수세기 동안 중국에 의해 또 이후 백년 넘게 일본에 의해 왜곡되어졌다보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구려의 강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며, 한국의 모든 학생들은 고구려의 강역이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로 축소된 역사를 배우고 있다. 동양사학계가 비정한 고대 고구려의 도읍지는 건국 후 464년간은 길림성 집안과 그 부근이었고, 이후 240년간은 한반도북부의 평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사서나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역사자료들을 동원해 지명에 대한 참고자료가 풍부한 전쟁기록을 오랫동안 연구해본 결과 명나라 이래 지금까지 수세기동안 중국은 우리의 역사강역을 축소시키기 위해 지명이동을 통한 역사왜곡을 자행했음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고대 고구려의 모든 도읍들은 산서성에 있었다. 첫 도읍지 졸본은 태원시에, 두 번째 국내성은 평요현에, 세 번째 환도와 안시성은 신강현에, 마지막 평양성은 임분시이고 아직도 그곳에는 유적이나 그 흔적이 남아있다.

 

즉 대제국 고구려는 동아시아대륙을 지배했던 큰 호랑이였으나, 그러다보니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왜곡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원상대로 바로 잡는 일이야말로 대한민국 출발 100년의 중요한 숙제가 될 것이다.

 

. 머리말

 동방의 등불이었던 우리 민족은 명나라의 속국이 된 조선왕조 600년과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찬란했던 역사를 많이 잃어버렸다. 특히 대일항쟁기간 중에는 우리 역사가 거의 말살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내 취조국을 두고 식민통치에 필요한 역사자료의 수집·조사사업을 해오다가 1915년 중추원에 편찬과를 신설해 이관시켰다. 1919년 범국민적인 기미독립선언 이후 일제는 우리의 혼인 민족사를 본격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역사편찬전문기관의 설치를 서두르게 된다. 그 결과 192212월 조선총독부 직할기관으로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가 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재조직되었던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은 크게 단군신화반도사관으로 대변된다.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의 뿌리를 거세해 스스로 조상을 부정하는 우매한 민족으로 만들겠다는 것이고, 반도사관이란 대륙에서 활동했던 삼국 이전 조상들의 무대를 작은 한반도 내로 축소시킨 것을 말한다. 대한민국의 미래에 큰 위험요소라고 할 수 있는 동북공정과 황국사관과 같은 역사왜곡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반도사관이 얼마나 잘못된 이론인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척도라 할 수 있는 고구려 도읍지를 찾는 과정을 통해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특히 지명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관구검의 침략과 당태종과의 안시성전투와 같은 전쟁기록을 통해 그 위치를 추적해보도록 하겠다. 국제전이었던 관계로 중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참고자료들이 많아 그 위치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고구려 도읍지 관련 기록

 

고구려 도읍지의 연혁에 대해 정리해놓은 삼국사기』「37 잡지6 지리4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몽이 흘승골성에 도읍을 정한 때로부터 40년이 지나서 유류왕22(3)에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다. (중략) 국내성에 도읍한 지 425년이 지난 장수왕 15(427)에 평양으로 옮겼으며, 평양에서 156년이 지난 평원왕 28(586)에 장안성으로 옮겼으며, 장안성에서 83년이 지난 보장왕 27(668)에 멸망하였다.”

 

위 기록에는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산상왕 “13(209) 겨울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겼다.”는 기록과,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으로 도읍 환도성이 불타 “21(247)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조에 “12(342) 가을 8월 환도성으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13(343)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

 

산상왕 때 천도한 환도성이 누락된 이유는 한중일 사학계가 괄지지(括地志)불내성(不耐城)은 곧 국내성(國內城)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라 하였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환도성을 국내성과 같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사학계는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길림성 집안을 환도성과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분명한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최초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삼국사기』「지리에는 장수왕이라고 되어있으나, 고구려국본기에는 동천왕으로 기록되어 있어 본기와 지리지가 다르게 기록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1. 고구려의 시국처 졸본성  

(1)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의 졸본성 기록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서의 졸본성(卒本城)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부여의 왕자들과 여러 신하가 주몽을 죽이려고 모의하자, 어머니 유화부인이 그들의 계략을 몰래 알아내 아들에게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너의 재주와 지략으로 어디 간들 못 살겠느냐? 여기서 지체하며 머물다가 욕을 당하느니 멀리 가서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그리하여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벗과 함께 엄표수(淹淲水)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강을 건너려고 했으나 다리가 없어 따라오는 병사들에게 잡힐까 두려워했다. 주몽이 강을 향해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가는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건너게 해주고는 곧 흩어져버려 뒤쫓던 기병들을 따돌렸다.”

 

호태왕 비문에는 이 부분이 약간 다르게 되어 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으니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거마를 타고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에 다다랐다.

 

왕이 나루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요, 어머니가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잇고 거북이들을 뜨게 하라.’고 했다. 그 소리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들이 물 위에 떴다. 그런 뒤 물을 건너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 성산(城山) 위에다 도읍을 세웠다.”

 

고구리인이 직접 새긴 비문에 의하면 추모왕이 말이 아닌 수레()를 타고 순행 길에 엄리대수에 이른 것으로 보아 그를 죽이기 위해 뒤를 추격하는 병사들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나루터에서 자신이 추모왕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시 이미 왕의 신분이었으므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기보다는 도읍을 옮긴 기록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이어 삼국사기에는 주몽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黙居) 세 사람을 만나 각자에게 성씨를 주고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그곳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하가 험하고 견고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하려 했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이로 인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19년 가을 9, 왕이 죽으니 나이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서 다른 설로,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비상한 사람인 것을 알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고,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소개되어있다.

 

(2) 삼국사기』「지리의 졸본성 기록

통전에는 주몽이 한나라 건소2(기원전 37)에 북부여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떠나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성씨를 ()’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古記)에는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홀승골성과 졸본은 같은 지방인 듯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보술수는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는 엄표수(淹淲水)로 기록되어 있다.

 

이어 한서지(漢書志)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낙양과의 거리가 36백 리이며 이에 속한 현으로 무려(無慮)현이 있었으니 바로 주례(周禮)에 이른바 북진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때는 그 아래쪽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현도군(玄菟郡)은 낙양과 동북으로 4천 리 떨어져 있었고 이에 속한 현은 셋이다. 고구려가 그 중의 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즉 주몽이 도읍을 정한 곳이라고 하는 흘승골과 졸본이란 지방은 아마도 한나라 현도군의 경내이고 대요국 동경의 서쪽인 듯하며, 한서지에 이른바 현도군의 속현으로써의 고구려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옛날 대요가 멸망하기 이전에 요제가 연경에 있었으므로 우리 사신들이 동경을 지나 요수를 건너 하루 이틀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계(燕薊)로 향하였기 때문에 한서지의 기록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기록들이 있으나, 이것들로 졸본성의 위치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지리에 언급된 졸본이 현토군의 경내라는 설명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유주에 속하는현토군에 있는 3개의 현 중 고구려(高句驪)현은 나라 고구려(高句麗)가 아니라 일개 지명임에도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에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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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6/17 [20:32]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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