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대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동족 북연 왕들을 보살펴준 광개토호태왕 (3부)
북연왕 모용운은 원래 고운, 뒤를 이은 풍발도 고구리 출신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9/07/02 [22:29]

복원된 호태왕 비문 17(407) 기사의 원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년 정미년(407)에 보기병 5만을 파견해 (연의) 숙군성으로 가서 토벌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처음에는() 포위만 하고 있다가 이어 군사가 바로 도착하여 맞싸워 베어죽이고 모두 소탕하니 노획물이 개갑 1만여 벌이요 군수물자와 기계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돌아오면서 사구성과 루성을 격파해 군현으로 삼았으며 독발선비의 항복을 받고 이어 량주성을 기습 공격해 빼앗았다.”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往討宿軍城 以太口牛 師直至合戰斬煞蕩盡所 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樓城爲郡縣 降禿髮因襲取凉州城.”

 

위 문구 중 중국은 숙군성(宿軍城)으로 가서 토벌했다.”는 문구를 없앰으로써 호태왕의 보기병 5만이 정벌한 상대가 후연(後燕)이 아니라 마치 왜()인 것처럼 오인하도록 조작했을 뿐만 아니라, 사구성과 루성이 고구리 군현으로 되고 량주성을 기습해 빼앗으니 독발선비가 항복했다.”는 내용을 큰 치욕으로 여겨 고의로 글자들을 없애버렸다. 

 

위 문구에서 고구리가 1만 벌()이나 노획했다는 개갑(鎧鉀)은 바로 고구리 개마무사(鎧馬武士-철갑기병)들이 착용했던 찰갑(札甲)을 의미한다. 찰갑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미늘 수백 개를 소가죽 끈을 이용해 종횡으로 엮어 만들었기에 철제판갑(板甲)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워 착용감과 활동성을 크게 향상시킨 갑옷이다.

 

양서(梁書)고구려전고구려 사람들은 기의 힘을 숭상하며, 활과 화살, 칼과 창을 잘 다루었고, 개갑(鎧甲)이 있어 전투에 능해 옥저·동예 모두를 복속시켰다.(國人尙氣力 便弓矢刀矛 有鎧甲習戰鬪 沃沮東穢皆屬焉.)”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개갑은 원래 고구려에서 유래한 갑옷이라 하겠다.

  

▲     © 편집부

 

▲ 삼실총벽화 공성도(攻城圖)에 그려진 개갑을 입은 고구려 찰갑기병    © 편집부

 

동족 북연을 끝까지 돌봐준 고구리 호태왕

 

17(407) 기사 이후 북연에 대한 기록이 없는 이유는 고구리와 동족이라 서로 전쟁 없이 잘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17(408) 3,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 왕 모용운이 시어사 이발을 보내 답례했다. 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가 태자 때 운의 무예가 뛰어남을 알고 그를 기용했고, 모용보가 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성을 주었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후연에서 장수 풍발이 왕 모용희를 죽이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왕으로 추대하자 성을 본래의 성인 고씨로 고치면서도 국호 연()은 그대로 유지했다. 고운과 풍씨의 연을 통상 북연(北燕)이라고 하는데, 모용운까지를 후연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고운은 측근인 이반과 도인에게 막강권한을 주었는데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권력을 주지 않는 고운을 원망하며 직접 왕이 되려고 409년 고운을 암살했다. 이에 풍발이 이반과 도인을 주살함으로써 혼란을 평정하고는 스스로 고운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이어 고구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이 등극하게 된 부득이한 사정을 호태왕에게 고하고는 인준을 받으려고 했다. <고구리사초략>“21(411) 신해 정월, 풍발이 사신을 보내와서 아뢰길 신은 앞서 신하였던 고운이 남긴 조서에 따라 보위를 이었고, 고운의 딸을 처로 삼았으며, 세세토록 조상나라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삼가 저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챙겨 바치며 성의를 표합니다.’라고 고하자 호태왕은 사신을 참하고 죄를 물으려고 했으나, 연도와 붕련이 간하면서 말리기에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풍발 역시 고구리의 후예였음을 알 수 있다.

  

▲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 무릎 꿇은 북연 왕 고운과 풍발 장군(좌)     © 편집부

 

북연 왕 풍발은 국내정치를 안정시키는 한편, 고구려와는 계속 화친하면서도 북위와는 대립했다. 420(갑인) 5월에 풍발이 인삼 100, 호피 20, 면포 50필을 바치니 장수태왕은 목화씨가 필요하다고 명했고, 7월에 북위에서 온 사신이 토산물을 바치면서 북연을 토벌해 그 땅을 나누어 갖자고 의논했다. 이에 북연과 북위 모두 선비족이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함에도, 어찌 서로를 토벌하려 하는가?”라고 반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북연에서 풍발이 살아있을 때만해도 서로 세력이 대등했으나 430년에 풍발이 죽자 북위가 점차 우세를 점하게 된다. 풍발의 태자와 풍발의 동생 풍홍 숙질사이에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북연은 큰 혼란에 빠졌다가 풍홍이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내전의 여파로 북연은 북위의 침략을 허용해 결국 국가위기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434(갑술) 4, 풍홍이 사자를 보내 신하를 칭하고는 구원을 청했다. 이에 장수태왕은 북위의 탁발도가 내게는 그대의 땅을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뒷구멍으로 침식해 들어가고 있으니 쥐새끼나 고양이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소. 요수(遼隧) 서쪽은 짐이 알아야 할 바 아니겠으나, 만약 용성을 침입하면 짐이 맡아서 토벌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435(을해) 6, 북위 사신이 아뢰길 소국(북위)은 폐하를 성심으로 섬김에 흠결 하나 없사옵니다. 근자에 풍홍이 상국(고구리)에 사신을 보내 밀통하여 신의 나라를 염탐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심히 놀랐습니다.”라고 하니 장수태왕은 이간하려는 말일 것이오. 풍홍이 여러 번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하긴 했으나, 짐은 허락지 않았으니 그대들은 마음 놓으시오.”라고 답했다. 얼마 후 풍홍이 사람을 보내 정탐할 뿐만 아니라 만약의 사태가 나면 고구려로 망명할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436(병자) 4, 북위가 북연의 백랑성(白狼城)을 쳐서 빼앗으니 도읍 용성(龍城)이 큰 혼란에 빠져, 동쪽으로 피난 가는 행렬이 수십 리를 이어졌다. 북연 사신이 장수태왕에게 또 찾아와서는 구원해달라고 애걸했다. 이에 병사 2만 명을 용성으로 들어가게 했으며, 군에 명을 내려 낡은 옷 대신 그곳 무기고에 있는 좋은 식량과 무기를 취해 군사들에게 주어 성내를 대대적으로 노략했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백랑(白狼)은 유주(幽州)에 속한 우북평(右北平)군에 속한 현이고, 용성(龍城=柳城)은 요서(遼西)군에 속한 현이다. 평성(平城)이 도읍인 북위에게 백랑성을 빼앗기자 풍홍이 구원을 요청해 고구리가 북위보다 용성에 먼저 들어가 풍홍을 구조해냈다는 것은 고구리가 용성에서 우북평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약 고구리가 한반도에 있었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기록인 것이다.

 

▲ 중국이 제멋대로 그린 북연 지도에는 도읍 용성이 요녕성에 그려져 있다     © 편집부

  

5, 풍홍은 북위가 점점 압박해오자 궁전에 불을 지르고는 부인들에게 갑옷을 입히고는 병사들로 하여금 둘러싸라고 명했다. 고구리 기병들을 후방에다 펼쳐 북위의 추격을 막으면서 가는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였다고 한다. 풍홍을 평곽(平郭-요동군)에 있게 했다. 북위에서 사신이 찾아와서는 풍홍을 내달라고 요청하니, 태왕은 풍홍이 비록 북위에게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나의 신민이 되었으니 그를 죽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겨울에 풍홍을 북풍(北豊)으로 옮겼다.

 

438(무인) 3, 풍홍이 남조의 송나라 왕 의륭과 상통해 망명을 요청했다. 의륭은 백구 등과 무리 수천을 보내 평곽 강 앞에 큰 배를 정박시켰다. 이에 태왕이 장수들에게 명해 그들과 풍홍과 그 가족들을 격살하고 그들의 배 78척을 빼앗았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9/07/02 [22:29]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