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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에게 불탄 환도성을 찾아서 (2부)
비류슈와 양구는 어디인가?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9/11/03 [17:54]

 

 

2. 초기도읍지 국내 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

 

국내 위나암성은 유리명왕 이래로 200년 이상 오랫동안 고구려의 도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전쟁이 없던 평화시대의 도읍지라 그런지 역사기록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 그 위치를 찾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1)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의 국내성 기록

유리왕 21(2) 3, 하늘에 제사용 돼지가 달아났다. 임금은 제물을 관장하는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땅 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민가에 가두어두고 돌아와 왕에게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의 산수가 깊고 험한데다가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게다가 고라니와 사슴,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았습니다. 임금께서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들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9월에 국내를 순시하여 지세를 살핀 후 이듬해 겨울 10, 임금은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삼국사기잡지 지리편의 국내성 설명

한서에 이르기를 낙랑군에 속한 현에 불이현이 있다.’고 하였고, 총장2(서기 669)에 영국공 이적이 칙명에 의해 고구려의 모든 성에 도독부와 주현을 설치했다. 그 목록에 압록강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이 11개인데 그 중 하나가 국내성이며, 평양으로부터 국내성까지는 17개의 역()을 거친다.’하였으니, 국내성 역시 북조(고구려) 경내에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국내성에 도읍하여 425년을 지낸 후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기이다. 국내성이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해는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는 유리명왕22(3) ~ 산상왕13(209)으로 206년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지리지에는 425년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국내성과 아무 상관없는 낙랑군의 불이현이 왜 언급되어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우황후의 농간으로 서출 동생에게 태왕위가 돌아가자 반란을 일으킨 적출 형님 발기© 편집부

 

3. 관구검에게 불탄 환도성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다음 보위가 동복아우인 발기(發岐)에게 가지 않고, ()왕후가 가짜조서를 꾸며 연인이었던 서출 이복동생 연우(延優,산상왕)를 즉위시킨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발기가 반란을 일으켜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을 찾아가 3만의 병력지원을 요청하니 공손탁은 발기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고구려의 서쪽 땅인 요동을 차지해버렸다.

 

역적 발기가 자결함으로써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고구려가 입은 손실은 실로 컸다. 이어 산상왕은 3번째 도읍지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에 산상왕 2(198) 2월에 환도성을 쌓고, 13(209) 겨울 10월에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1) 관구검에게 불탄 환도성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에서 3에 걸쳐 50년 동안 독자세력을 구축했던 공손(公孫)씨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위나라의 공격에 의해 238년에 멸망하고 만다. 려위(麗魏)상호동맹에 의해 공손씨가 멸망하면 요동을 원래 주인이었던 고구려에게 돌려주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위나라가 오히려 주력부대를 전략적 유충지인 서안평으로 옮겨 동쪽을 도모하려 하자, 이에 대노한 동천왕이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해 2425월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해 차지해버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다.  

 

▲ 식민사학계에서 멋대로 그린 관구검침공로     © 편집부

 

삼국지』「위서관구검전의 두 기록을 보기로 하겠다. 첫째 기록인 정시(正始)중 고구려가 배반해 수차례 침범하자 관구검이 보·기병 1만을 이끌고 현토에서 출전해 여러 길로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왕 궁(동천왕)이 보·기병 2만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상류로 진군해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워 계속 패해 궁이 패주했다. 관구검은 말이 미끄러지지 않게 말발굽을 싸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여 환도(丸都)에 올라 고구려의 도읍을 도륙내고 수천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다.”는 기록의 왜곡 여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언급된 지명을 추적해 환도성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있는 역사적 사실은 환도성이 올라가기 상당히 힘든 험한 산 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1) 비류수(沸流水)는 어디인가?

통전한나라 건안(196~220) 중 고구려왕 이이모가 새 도읍을 세웠는데 성은 환도산 아래 비류수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과 동천왕이 위나라 관구검과 1차 전투를 벌였던 비류수는 과연 어디일까? 비류수는 일반명사로 온천수일 수도 있고, 고유명사로 특정 물길의 이름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명이라 그런지 노출되어있지 않고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는 강수(絳水)로 설명되어 있었다.

 

환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다는 비류수 즉 강수는 바로 산서성 남부 운성시 동쪽에 있는 강현에서 나와 임분시의 남쪽 곡옥현을 흘러 회수로 들어가는 물길이었던 것이다. 또한 括地志에는 강수는 일명 백수, 현재이름 비천, 근원은 강산에서 나온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류수가 같은 뜻인 비천(沸泉)으로 바꿔져있음을 알 수 있다.

 

강수는 산서성 분하의 지류를 모아놓은 수경주6의 회수(澮水)편과,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탁장수(濁漳水)와 청장수(淸漳水)에 대한 설명인 수경주10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환도성은 산서성 동남부에 있어야 하거늘, 1906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길림성 집안을 환도성으로 비정한 것이야말로 그야말로 역사조작이 아닐 수 없다. 발견된 비석의 일부가 관구검기공비라는 근거도 빈약함에도 말이다...  

 

▲ 비류수는 산시성 강현에 있는 강수, 양수는 산서성 장치시를 흐르는 강     © 편집부


2)양구(梁口)는 어디인가?

고구려 동천왕과 위나라 관구검이 전투를 벌인 곳이 삼국사기에는 양맥(梁貊)의 골짜기로 적혀있고, 삼국지』「위서관구검전에는 양구(梁口)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구는 바로 양수(梁水)의 하구를 말하는 것이다.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의 요동군에 언급된 양() 역시 바로 양수를 말하는데, <중국고대지명대사전>양수는 산서성 장자현 동쪽에 있다.

 

수경주에 양수는 남양산에서 나와 북류해 장자현 고성 남쪽까지 흘러 북쪽에서 장수로 들어간다.”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수경주는 권10으로 산서성 동남부를 흐르는 탁장수(濁漳水)와 청장수(淸漳水)의 물길에 대한 설명이다. 그 위치가 강수(降水)의 동북쪽으로 상류에 있는 강으로 삼국지』「위서관구검전의 비류수(沸流水) 상류로 진군해 양구(梁口)에서 크게 싸워라는 문구와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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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03 [17:5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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