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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에 수없이 등장하는 부여의 정체는? (1부)
대부여,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와 갈사부여, 여나부여, 서부여, 남부여의 차이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9/11/06 [10:57]

 호태왕 비문의 아래 영락 20년 기사는 공적비문으로는 마지막 문구로서 앞부분에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예전에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하지 않으므로 왕께서 친히 거느리고 가서 토벌했다.”라는 내용이 있어 동부여 정벌을 기록한 비문임을 알 수 있다. 동부여는 과연 고구리와 어떤 관계였기에 호태왕이 친히 정벌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비문) 廿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軍 到餘城而餘擧國駭皆歸服王赦宥均追虜王恩普處於是旅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城立鴨盧肅斯舍鴨盧竦斯婁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

 

그런데 아래에서 보듯이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부여 앞에 수식어를 붙여서 세분하지 않으면 역사해석에 혼선이 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단사학계에서 정사(正史)라고 하는 <삼국사기>에는 각각의 부여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부여(夫餘)로만 기록되어 있다. 지금부터 우리 역사에 어떠한 부여들이 있었는지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먼저 부여(夫餘)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북애자 노인이 쓴 <규원사화>단군기의 기록에 의하면 국조 단군왕검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부루(夫婁)는 태자로 책봉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인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에게는 서쪽 땅을 주어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당시 단군왕검의 4째 아들이 다스리던 땅(나라)의 이름을 부여라고 불렀던 것으로, 부여는 대대로 조선대연방의 일원으로 큰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1) 대부여(大夫餘) : 조선의 44대 구물 단군은 B.C 425년에 즉위하면서부터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부르게 했다. 그 전 해에 서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우화충이 도성을 점령하자 43대 물리 단군이 피신했다가 붕어하고 만다. 상장군 구물(丘勿)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여 단군으로 추대되었는데, 최고통치자의 혈통이 바뀌다보니 국호가 바뀐 것이다. 

       

▲ (좌측> 북부여 시조 해모수 단군, (우측) 북부여 5세 고두막 단군, 김산호 화백 작품     © 편집부

 

(2) 북부여(北夫餘) : B.C 239년 해모수가 정변을 일으키니 대부여의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이 제위를 버리고 입산해 신선이 되어버린다. 이에 5가(우가·마가·구가·저가·양가)에 의한 공화제가 6년간 실시되었다가 해모수가 오가를 회유해 공화제를 철폐하고는 단군으로 추대되면서부터 나라이름을 북부여라고 불렀다. 최고통치자의 혈통이 바뀌다보니 국호는 바뀌었으나, 조선 --> 대부여 --> 북부여로 이어지는 정통성은 그대로 계승되었다.

 

(3) 졸본부여(卒本夫餘) : 북부여 4세 해우루 단군 때인 B.C 108년 한나라 무제가 번조선을 공격했다가 참패했으나 번조선 대신들이 우거왕을 죽이고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나라에서 사군을 설치하기 위해 계속 병력을 보내자, 대부여의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인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졸본에서 즉위하고는 스스로 국호를 동명(東明)이라고 했다. 이를 졸본부여라고 한다.

 

소수의 의병에서 출발해 한나라 도적떼를 격파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비축하게 된 고두막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북부여를 접수해 5대 단군으로 즉위함으로써 졸본부여(동명국)는 북부여로 합쳐지게 된다. B.C 58년 고주몽이 북부여 6대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잇고는 B.C 37년 국호를 북부여에서 고구리(高句麗)로 바꾼다. 따라서 고구리는 조선, 대부여, 북부여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나라였던 것이다. 

       

(4) 동부여(東夫餘)와 갈사부여(曷思夫餘) : 강력해진 졸본부여(동명국)의 고두막한은 북부여 4세 해우루 단군에게 북부여를 자신에게 넘기고 도성을 옮기라고 겁박하니 해우루 단군은 병을 나서 붕어하고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했다. 고두막한이 계속 압박하자 해우루는 고두막에게 항복하고는 제후가 되어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를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한다.

 

동부여 해우루 왕의 뒤를 이어 B.C 47년에 금와(金蛙)가 2세 왕으로 즉위했고, 그 뒤를 이어 아들인 대소(帶素)가 3세 왕으로 즉위했다. 대소 왕이 22년 대무신제가 다스리던 고구리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대소의 동생이 갈사국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갈사부여(曷思夫餘)라고 한다. 갈사국은 3세 47년 만인 68년 고구리에게 항복하고 동부여후(東夫餘候)로 책봉된다.

 

위 호태왕 20년 비문에 등장하는 동부여는 바로 이들의 후예였던 것이다. 이들은 고구리 초기에 나라가 아닌 동부여후로 책봉되어 계속 조공을 바치다가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기에 친히 호태왕이 이들을 응징한 내용을 비문에 기록해놓은 것이다.

 

(5)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 : 대소 왕의 6촌 동생이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하자 고구리는 그를 왕(제후)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편입시켰다. 뒤에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니 연(燕)나라 땅과 가까웠다고 한다. 문자명제 때인 494년 나라를 들어 바치고는 아예 고구리의 연나부에 편입되는데, 이를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라 한다.

 

▲     © 편집부

 

(6) 서부여(西夫餘) :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의려국(依慮國)의 왕인 의라가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에게 쫓기다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倭人)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을 연나부부여의 후손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로 아래 기록들에 언급된 위구태(尉仇台) 이후 간위거, 마여, 의려, 의라로 왕위가 이어졌다는 중국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태조대왕 69년(121) 고구리가 1만 군사로 현토성을 포위하니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막아 싸우게 하니 고구리 군사가 대패했다. 이듬해 태조대왕이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고구리 군사들을 부수었다.”라는 기록과

 

“70년(122), 임금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의 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동)부여는 고구리와 상당히 적대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리사초략>에는 “태조황제 10년 신유(121) 12월, 요광이 구려의 거수를 꼬드겨 현토도위로 삼고 비리(卑離)의 반적 위구태와 함께 모의하여 자몽고지(紫蒙故地)를 회복하려 천서(川西)에 새로이 현토부를 두고서 그곳에 머무르매, 상이 마한・개마의 기병 1만을 이끌고 천서를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라는 기록과

 

“태조황제 11년 임술(122) 2월, 상이 다시금 마한・구다・개마 3국의 군대를 이끌고 천서(川西)와 구려(勾麗)성을 쳐서 빼앗았다. 요광은 달아나다 제 부하에게 죽고, 위구태는 서자몽으로 피해 들어가 서부여(西夫餘)를 자칭했다가 훗날에 우문선비에게 쫓겨났다.”는 기록이 있어 위구태가 스스로 자칭한 부여는 서부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와 <고구리사초략> 공히 121년에는 고구리가 위구태에게 패했다고 기록했으나, <삼국사기>는 고구리가 이긴 122년의 전쟁 역시 패했다고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서부여는 연나부부여에서 자립해 연(燕)나라 땅과 가까웠던 개원 서북쪽으로부터 옮겨간 그들의 후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7) 남부여(南夫餘) : 백제도 고구리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온 나라이기 때문에 황족의 성을 부여(夫餘)라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26대 성왕 16년(538) 봄에 도읍을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우리 역사에는 모두 7개 부여가 나오기 때문에, 각각의 부여 앞에 수식어를 붙여 상세히 구분하지 않으면 우리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기 곤란해진다. 어불성설의 단군신화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였던 조선의 역사를 신화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이렇듯 여러 부여를 모두 하나의 부여로 혼돈하게 된 것은 일제식민사학과 중화사대사학을 추종한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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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06 [10:57]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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