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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안시성에서 갑자기 철군한 이유 (7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9/11/17 [16:26]

 

1) 당태종의 안시성 퇴각 이유

 

여하튼 안시성에서 1~2차례 소규모 국지전을 벌이다가 2달이나 걸려 쌓은 토산을 빼앗긴 당태종이 갑자기 추위와 군량 때문에 안시성에서 철수했다는 중국기록은 마치 만취한 사람의 필름이 끊어지듯 뭔가 중요한 상황이 생략되었던 것이다.

 

설연타가 공격해왔기 때문에 철수한 것이라고 하나 타이밍이 안 맞아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또는 내란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연개소문과 정예병 3만이 남으로 장성을 넘어 상곡(上谷)을 습격하니 당시 어양(漁陽)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태자가 놀란 나머지 급하게 잘못 올린 내란 발생 봉화 때문이라고 하나 그것도 철수의 진정한 이유가 될 수 없다.

 

<태백일사>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막리지(연개소문)는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순시하며 난파에 주둔하면서 전황을 보고받고는 사방에서의 총공격을 명령했다. 고연수 등이 말갈과 더불어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전투를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떨쳐 모두 일당백이었다.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긴 이세민이 감히 싸우려고 진을 나서자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쏘아 이세민의 왼쪽 눈을 맞혔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이세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군사들 틈에 끼여 도망쳤다.”

 

당태종의 갑작스런 퇴각 이유는 추워지는 겨울날씨와 군량 때문이 아니라, 바로 안시성주 양만춘이 쏜 화살이 당태종의 왼쪽 눈을 맞혔기 때문이다. 당태종은 귀국한지 4년 만에 죽는데 <자치통감>에 그의 병명은 종기·풍질·이질에다가 정신이상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요동정벌을 떠나기 전까지 튼튼했던 당태종이 돌아오자마자 온갖 병마에 시달리다가 4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병사한 이유는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독화살을 맞왼쪽 눈에 맞은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나라를 위해 수치를 숨긴다는 춘추필법의 사필원칙에 입각해 기록된 중국정사에서 찾을 수 없는 양만춘의 이 쾌거는 <태백일사>의 기록과 구전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목은 이색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이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라고 하더니만, 눈에 화살이 떨어질 줄 누가 알았으랴.”라고 했고, 노가재·김창흠의 천산시(千山詩)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 규염(虯髥)의 눈동자를 쏘아 떨어뜨렸네.”라고 읊었다고 기술되어있다.

 

▲ 양만춘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은 당 태종 이세민     ©편집부

 

2) 요택에서 항복한 당태종

 

918일 당태종은 전군에 총 퇴각명령을 내렸다.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에게 4만 명의 보·기병을 주어 후위를 맡기고는 20일 요동성을 지나 21일 요수를 건너 요택에 이르렀으나 늪지대는 말과 수레가 건너지 못할 정도였다. 장손무기에게 영을 내려 1만 명의 군사들에게 풀을 베어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징검다리를 삼아 건너도록 했다.

 

이어 겨울 101일 포오거(浦吾渠))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는 길을 메운 병사들을 독려해 발착수(渤錯水)를 건너게 하는데 폭풍을 동반한 폭설이 몰아치자 옷이 젖어 죽는 병사가 많아 길가에 불을 피워 병사들을 기다렸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요택을 통과하기 위해 부랴부랴 임시도로를 만드는 모습으로, 당태종도 몸소 나무를 말안장에 묶어 일을 도왔을 정도로 다급했던 상황이었다.

 

비록 지연전을 펴면서 퇴각하는 4만 명의 후위 보기병들이 있다고는 하나 막리지의 총공격명령에 의해 고구려의 모든 군대가 총출동해 당 태종의 후미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200리나 되는 진흙밭을 풀을 베어다가 메꾸고 수레로 징검다리를 만들어 후다닥 건너갔다는 기록은 그야말로 어불성설로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이야기이다. 메마른 음력 9월말에 풀이 얼마나 있을 것이며 또 풀과 수레로 다리가 가능하겠는가? 고구려 기병에게 바짝 추격당해 줄행랑을 치고 있는 당나라 군사들이 수레를 그토록 많이 끌고 갔다는 건 삼척동자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의 후퇴과정은 <삼국사기>와 동일한데 발착수 이후 당태종 퇴각장면은 <태백일사>에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하여 아주 바짝 추격했다. 추정국이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易水)를 건넜다. 뒤를 바짝 쫓으니 당태종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성에 입성하여 약속하니 산서, 하북, 산동성과 강좌(양자강 이북)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위 <태백일사>의 기록을 무척 통쾌하게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구리로 들어올 때 흙다리를 만들어 요택을 통과한 후 병사들의 전투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모두 없앴기 때문에, 퇴각할 때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생쥐와 같았을 텐데 당태종이 어찌 요택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여러 정황으로 미뤄보았을 때,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리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음이 분명하다.

 

▲ 요택을 건너온 흙다리를 없애 퇴로가 막혀 결국 항복한 당태종     © 편집부


당태종의 항복기록은 중국 정사에는 보이지 않지만 경극에는 그 내용이 녹아있다. 연개소문과 설인귀와 당태종이 등장하는 경극에는 몇 종류가 있는데,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등이다. 특히 <분하만>이라는 경극 제목에서 보듯이 당태종이 늪에 빠진 곳이 안시성 앞을 흐르는 현 분하로 그곳이 어니하라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들 경극에 연개소문에게 쫓겨 진흙수렁에 빠져 극심한 곤경에 처한 당태종이 항복하려는 순간 설인귀가 나타나 구해내주 장면이 나오는데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다음 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대사는 중국인이 쓴 것이지 한국인이 쓴 대본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상황이 축소되었으면 되었지 확대과장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당태종이 울부짖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엾게 봐주소서.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가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당나라 땅의 절반을 주겠노라.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가 너의 신하가 되겠노라.”

 

▲ 경극 살사문의 한 장면     © 편집부
▲ 요동정벌을 하러 왔다가 눈에 화살 맞고 도망가면서 피눈물을 흘린 당태종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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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1/17 [16:26]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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